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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국학칼럼

[국학원 국민강좌]환웅세력의 이주와 홍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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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족은 단군신화의 주인공이 아니다.

 

필자는 한국의 고대종교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한민족의 정신사를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그 무엇을 이해하려면 가장 시급한 것이 한민족 초기공동체를 담당한 사람과 그 이후의 주도세력이 누구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필자는 단군신화의 주인공이 환웅세력과 곰 토템 부족, 부여와 삼국의 왕족 세력인 부여족, 신라의 김씨 왕족 등에 관해서 연구했고 그 결과를 책으로 발표했다.

 

왜 한민족 초기 공동체를 주도한 주민에 관한 이해가 필요한가. 가령 최치원 선생이 풍류도가 유불선 삼교를 포함한다고 했을 때, 풍류도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한민족 초기 공동체를 주도한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의 정신 문화와 연결된 풍류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풍류도에 관해서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글을 발표하지만 동어 반복적인 표현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도 한민족 초기공동체를 구성한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강단학자들은 문헌자료가 부족함만 탓하고 있다. 요서지역에서 요하문명이 대대적으로 발굴되어도 깊이 연구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민족 초기 공동체를 구성한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만 아직까지 정설이 없다.

혹자는 한민족 초기 공동체를 이끈 사람들이 동이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동이족이라는 명칭 자체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해서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문헌상으로 볼 때 선진시대까지의 동이족은 산동지역과 그 이남의 회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진•한 시기를 거치면서 중원 세력들이 대제국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산동을 비롯한 이전의 동이 지역이 중국에 편입되면서 연산산맥 너머의 동북 혹은 동쪽 지역을 동이라 칭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면 산동지역의 동이를 한민족 공동체의 주맥(主脈)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 중 일부가 동북으로 이동했다가 한반도로 이주하기는 했겠지만 그들이 한민족 초기 공동체(단군신화의 무대)의 주역은 아니었을 것이다.

1980년대 이후 홍산지역의 신석기문화가 대대적으로 발굴됨으로써 그 지역의 문화가 한민족 초기 공동체와 관련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언론이나 학자들 중에는 그 지역이 동이족의 문화라고 하면서 한민족과 동이족을 연결시키고 있다. 하지만 중국문헌에서 선진 시기에 동이를 칭하던 사람들과 홍산문화 지역 사람들은 별개의 사람들이다.

 

요하지역의 홍산문화와 그 이전의 신석기 문화 유적에서 새를 토템으로 하는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그들이 남하하여 산동지역으로 내려가 대문구 문화 등의 신석기 문화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의미에서는 요하문명 지역의 일부 세력을 동이족이라고 소급해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결과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선진 문헌 속의 동이족은 아니다. 선진 문헌에서 동이족을 말할 때 북경 이북 혹은 연산 너머의 어느 공간에는 숙신이라는 정치공동체가 있었다. 은나라 말기에 은나라가 동이족을 정벌했을 때 ‘숙신이 하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산동 중심의 동이와 별개로 그 이북 지역에 숙신이라는 정치공동체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들 숙신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분명 조선이란 정치공동체보다 먼저 이들 지역에 등장한다.

 

홍산문화의 곰 토템인과 공공족의 이주


또한 후기 홍산문화(기원전 3500년 전후) 지역의 주도세력은 곰을 토템으로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에 대해서 중국학자들도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이족과 이들 곰 토템 부족을 연결할 수 있는가? 곰 토템 부족은 기본적으로 바이칼 이동과 동시베리아 지역을 연고로 한 사람들이 남하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후기 홍산문화의 담당자들을 동이족이라고 칭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그리고 한민족 초기공동체의 주도세력에 대해서 연구할 때 유라시아 문명사의 큰 흐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바이칼 지역이 한민족 초기 구성원들의 기원지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단군신화가 보여 주듯이 환웅 세력은 현지 주민보다 앞선 종교이데올로기나 문화 역량을 가지고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때문에 후기 홍산문화와 그것에 뒤이어 일어난 하가점하층문화를 단군신화의 초기무대로 상정하려면, 유라시아 문명사에서 그들보다 앞선 이데올로기나 문화역량이 있는 지역에서 환웅세력이 이주해 왔어야만 한다. 바이칼 지역이 홍산문화 지역보다 앞선 문화 지역이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지 않나. 그곳이 어디인가? 바로 중국 황하 중류지역의 신석기 문화인 앙소문화 지역이다. 우리가 인류 4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로 배운 황하문명이 바로 앙소문화이다. 이들 앙소문화인과 홍산문화인이 교류하고 있었음은 이미 고고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한 가지 더 언급하고 넘어가자. 최근 들어 요하지역의 신석기인들이 이른 시기부터 상당한 역량을 가진 요하문명 일구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일부 사람들은 그곳이 환웅 세력, 더 나아가 환인 세력의 근거지인 것처럼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단군신화를 바탕으로 이해하면, 환웅은 이주세력임이 분명하다. 다른 곳에서 이주해온 세력으로 그들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필자는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환웅세력의 이주를 추적해 보았다. 환웅세력에 관한 단서는 삼국시대 선덕여왕 때 활약한 자장스님에게서 찾았다.『삼국유사』탑상편, 황룡사 9층탑조에 보면 자장 스님이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과 감통하여 문수보살에게서 전해들은 말이 실려 있다.


“너희 국왕은 인도의 찰리종족(刹利種族)의 왕인데 이미 불기(佛記)를 받았으므로 남다른 인연이 있으며, 동이공공(共工)의 종족과는 같지 않다.”


위에 인용한 자료는 엄밀히 말하면 역사연구의 직접적인 자료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한민족의 기원을 연구함에 있어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을 감안하고, 자장이라는 인물이 당시 최고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무턱대고 무시할 필요는 없다. 그의 아버지 김무력은 진덕여왕 때까지 재상을 비롯한 권신으로 활동하던 진골 귀족이다. 자장 또한 재상자리를 거부하고 출가한 인물이다. 자장은 지금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까지 전해오던 어떤 정보, 혹은 중국 유학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위와 같은 기록을 남겼을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필자는 이미 발표한 책에서 신라의 김씨 왕족은 오래전에 천산(天山)을 넘어와 그곳의 몽골리안[姜族 등]과 혼혈된 사람들이 동쪽으로 이주하여 신라까지 들어오게 된 과정을 밝힌바 있다. 필자도 어떤 계기가 있어 자장의 정보가 사실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해서 이들 공공족이 단군조선의 주도세력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다년간 자료를 검토하고 추적했다. 그 결과 한민족 고유의 핵심 문화코드를 공공족의 문화로 해석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필자가 파악한 공공족의 원주지는 천산(天山)이나 그 이서 지역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오래 전에 그들의 조상은 하서회랑을 거쳐서 황화 중류 지역, 즉 후에 한원(韓原)이라고 불린 지역에 들어와 농사와 어렵에 종사하면서 살았다. 그들이 일군 문화가 바로 일명 황하문명이라고 하는 앙소문화이다. 그들은 황제계의 사람들이 중원의 패권을 장악한 초기까지도 중원에 살았으며, 그 이후에도 상당기간 중원의 북쪽과 동북쪽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중국의 전설 시대의 이야기에 그들의 존재가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들은 황제계 이전에 천하의 주인이기도 했으며, 중원 지역의 농경문화를 주도했다. 그들이 중원에서 황제계에게 실질적으로 밀리기 시작한 것은 요임금 때이다. 단군신화에 보이는 요임금 50년의 비밀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이해함으로써 풀 수 있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인 동북 지역으로로 이주 했고 거기에서 자신들의 이상세계를 건설했다.


잠시 중국 문헌에 나타나는 공공에 대해서 살펴보자. 공공(共工)은 복희 여왜의 시대가 끝날 무렵 등장한다. 당나라의 학자인 사마정(司馬貞)은 여왜의 천하를 노려 공공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것을 축융(祝融)이 평정했다고 했다. 축융은 염제의 후손이라고도 하고 황제의 후손이라고도 하는 전욱(?頊)의 손자이다.


또한 공공은 인면사신주발(人面蛇身朱髮)이라고 묘사되기도 한다. 그 부하인 상류(相柳)는 머리가 아홉인 인면사신이고 푸른색의 흉측한 모습이었다. 공공은 『神異經』에 완우(頑愚)하다고 표현되었고, 『周語』에는 ‘천하를 해치다’라고 기록되었다. 이러한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공공은 중원 세계에서 상당히 미움을 샀던 세력이었던 것 같다. 그는 중국의 고대 신화세계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항상 악당의 역할로 등장한다. 그는 시간과 관계없이 악당이 필요할 때면 끌려나왔다.


공공의 또 다른 전적을 보자. 『사기』 초세가에 의하면, 전욱의 증손인 중려는 제 곡(황제의 증손)을 섬기고, 공공의 반란에 임해서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도 실패해서 주살 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요임금 시대에도 공공은 유주(幽州, 현 북경 주변)로 쫓겨나고, 순임금 때에는 유주로 유배를 갔다. 공공은 우(禹)의 시대에 또 다시 추방당한다.


위에 열거한 정보들로 우리는 공공과 후일 중원을 주도한 세력 간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신화 속의 공공은 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났다가는 당하고 있었다. 아무리 신화 속의 신이라고 천 년 가까이에 걸쳐서 계속 나타난다는 것은 너무 집요하다. 이것은 공공을 조상신이라고 우러르는 부족이 끊임없이 중원정권과 충돌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공공의 후예인 한민족의 영적 자존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북경 지역인 유주로 이주한 공공족


공공은 요임금 때 처음으로 유주지역으로 축출 되었는데, 당시 그들이 이주해간 곳이 지금의 북경시 밀운현이다. 밀운현에는 북경대학교 역사학계에서 발굴한 공공성 유지가 남아 있다. 한동안 그곳에 머물던 공공족이 연산을 넘어 홍산문화 지역으로 들어와 하가점하층문화의 주도 세력이 된다. 이들이 바로 숙신이라고 중국문헌에 기록된 사람들로 이들을 필자는 단군숙신이라고 규정한다.

 

 

 

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 세력은 길림성 방향으로 이동하여 숙신의 명맥을 이어가고, 다른 한 세력은 의무려산(醫巫閭山) 지역을 거쳐서 요동으로 진입한다. 요동지역으로 들어온 숙신 인들이 그곳에 고인돌을 만들었으며, 후대에 진국으로 불린 사람들의 조상이다.

숙신이 진번과 관련됨은 중국학자도 인정한다. 최근에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낸 중국의 ‘동북공정’이 발표됨으로써 야기된 고구려사 논쟁의 중심에 섰던 손진기도 숙신을 후대에 진번이라고 불렸다고 보았다. 진번의 진(眞)이 숙신계 주민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주장은 안정복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진번에 대해서 안정복은 『동사강목』「고이진번고(考異眞番考)」에서 진번의 진(眞)은 숙신의 신(?)에서 나왔고, 후세의 여진의 진(眞)은 진번의 진(眞)을 따른 것이라고 했다. 신채호를 비롯한 후대의 역사학자들도 이를 계승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요동으로 들어왔던 숙신인들이 문헌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요동에 살 때 혹은 그 이전부터 진인(辰人) 혹은 진인(眞人)으로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진국이라는 나라의 구성원의 정통성이 숙신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자장 스님은 문수보살에게 감응해서 얻은 정보라고 하면서, ‘신라 김씨 왕족 이전의 주도세력을 동이공공이라’고 했다. 김씨 왕족들이 주도하기 이전의 신라를 주도한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진한 12국의 하나인 사로국을 모태로 일어난 신라인들이었다. 진한 12국의 하나였던 사로국에서 출발한 신라는 공공족과 요서지역의 웅녀가 만나서 이루었던 단군숙신의 후예들인 진한인들과 단군숙신을 뒤이어 대릉하 유역에서 발흥한 고조선인들이 평양으로 들어왔다가 경상도 지역으로 이주한 사로 6촌인들이 힘을 합쳐 세운 나라이다. 다시 말하면 박혁거세는 진한 12국 중 하나인 사로국 지역에 들어온 고조선계 6촌 사람들의 옹립을 받아서 신라를 건국했다. 이들 주도세력은 범 숙신계, 즉 최근에 회자되고 있는 쥬신족이 주도한 나라이다.

 

환웅의 문화 한민족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공공족의 문화유산으로 한민족의 유무형문화의 뿌리를 이해 할 수 있다. 진한인들이 왜 편두를 했는지, 무당들이 왜 고깔모자를 쓰는지, 산신제를 올릴 때, 굿을 할 때 왜 명태나 북어를 바치는지, 조선 후기의 무신도에는 왜 칠성·고깔제석·삼신제석만이 고깔모자를 쓰는 지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다. 더불어 한민족의 주도 종교인 칠성신앙이 바로 공공족에 그것에서 시작되었음도 밝힌다. 또한 삼한 지역의 종교문화인 ‘소도’도 공공족의 문화로 이해할 수 있다. 다양한 도판 자료를 이용해 공공족의 이동과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화 흐름을 강의 중에 제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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